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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

[물류 관련 책]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5 : WW2 노르망디 상륙작전

by Vitaminymc 2024.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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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급전의 역사 (전쟁의 제1법칙 보급이 전장을 좌우한다)  ]


책의 4장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보급(병참) 역사를, 5장~7장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보급(병참) 역사를 다루고 있다. 
7장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다루고 있다.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주요 구절 ]

https://logistician.tistory.com/entry/%EB%AC%BC%EB%A5%98-%EA%B4%80%EB%A0%A8-%EC%B1%85-%EB%B3%B4%EA%B8%89%EC%A0%84%EC%9D%98-%EC%97%AD%EC%82%AC-Supplying-War-1

 

[물류 관련 책]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1

물류의 어원이 병참(logistics)이라는 측면에서, 군대의 물류체계에 대한 역사를 다룬 책이다. 모든 전공/학문의 개론(槪論)은 학문의 역사를 처음에 다룬다. 그 이유는 모든 학문이 철학에서 시작

logistician.tistory.com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7장 | 회계사들의 전쟁
계획의 함정
노르망디에서 센으로
‘광역 전선’이냐 ‘예리한 돌진’이냐?
결론
7. War of the accountants
   The pitfalls of planning
   Normandy to the Seine
   'Broad front' or 'knifelike thrust'?
   Conclusions

[ 7장.  회계사들의 전쟁 ]

계획의 함정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규모와 철두철미한 준비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병참 계획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 준비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

모든 지휘관들이 무엇보다도 결단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사상 가장 큰 상륙작전을 앞둔 지휘관은 철저한 준비를 요구했다. 역사상 어떤 군대도 작전의 입안과 실행을 준비하는데에 이처럼 치밀한 계획에 의지한 경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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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4-345 나폴레옹이 가장 성공적인 두 전역(1805년과 1809년)들은 거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된 데 반해, 러시아 원정은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규모와 철두철미한 준비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기습으로 시작했지만 사전에 몇 년 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상황과 몰트케(大)의 작전계획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중략) 전쟁이 시작되자 전황은 완전히 예상 밖으로 흘러 정성을 다해 마련했던 치밀한 계획해도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중략)

 

현대의 권위자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에 군사행동을 계획하고 수행했던 사람들 또한 “병참 계획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 준비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의 신형장비를 설계하여 완성하려면 몇 년이 걸리며, 또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장비를 대량생산하는 데에도 몇 년이 걸리지만 전술적, 정치적 요구는 몇 주 혹은 며칠 사이에도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역사상의 위대한 군인들은 계획을 입안할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략) 지난날의 수많은 지휘관들도 정치적 상황과 전술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필요한 모든 전쟁물자를 충분히 준비하면서 전쟁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모든 지휘관들이 무엇보다도 결단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략)


P.347 이상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사전준비 없이 급히 편성되었고 보유 장비들은 전투에 부적합한 것뿐이었으며 작전 명령도 즉흥적으로 내려진 불확실한 전역이었던 것에 비해, 1944년 6월 프랑스에 진공한 연합군은 통찰력과 조직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중략) 전사상 가장 큰 상륙작전을 앞둔 지휘관은 제리캔 (옆면이 납작한 철제 또는 플라스틱 연료통) 적재와 하역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준비를 요구했다. 역사상 어떤 군대도 작전의 입안과 실행을 준비하는데에 이처럼 치밀한 계획에 의지한 경우는 없었다. 

노르망디에서 센으로

나폴레옹은 보로디노 전투(1812년 러시아 원정) 전날 밤 깊은 명상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은 결정적인 지점에 최대한의 부대를 집중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가 이긴다” 결정적인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판단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그 판단은 천재성의 산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우연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지점이 확인되면 그 곳에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는 것은 보급기지, 병참선, 수송수단, 편성 등 요컨대 병참의 영역이다.

오버로드(Overload) 작전을 계획한 사람들은 연합군에 의한 유럽 진격의 성공 여부는 적보다 빠른 속도로 병력과 물자를 투입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륙하기 약 18개월 전부터 수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모델이 서서히 만들어졌다. 이것을 만든 목적은 병력과 물자의 투입에 영향을 줄 모든 요인에 관해 포괄적인 전쟁을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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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0-354 나폴레옹은 보로디노 전투(1812년 러시아 원정) 전날 밤 깊은 명상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은 결정적인 지점에 최대한의 부대를 집중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가 이긴다” 결정적인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판단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그 판단은 천재성의 산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우연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지점이 확인되면 그 곳에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는 것은 보급기지, 병참선, 수송수단, 편성 등 요컨대 병참의 영역이다.


오버로드(Overload) 작전을 계획한 사람들은 연합군에 의한 유럽 진격의 성공 여부는 적보다 빠른 속도로 병력과 물자를 투입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략) 이에 대한 연합국의 접근방법은 독특했다. 상륙하기 약 18개월 전부터 수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모델이 서서히 만들어졌다. 이것을 만든 목적은 병력과 물자의 투입에 영향을 줄 모든 요인에 관해 포괄적인 전쟁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델의 완성을 위해 몇 개월을 소비한 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다음과 같음을 확인했다.


(a) D-day에 사용할 상륙용 주정, 연안 운반선, 병력 수송선, 화물선, 유조선, 바지선의 수, 이를 이용해 일정시간 내에 상륙 가능한 병력과 장비의 최대량을 결정한다. 더욱이 그 배들은 화물을 싣기 위해 기지로 복귀해야만 하므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기지는 가능한 한 가까이 있어야 한다.
(b) 해변의 넓이와 수, 그 경사도(모든 유형의 배가 해안에 최대한 접근해야 하므로 해안지형은 매우 중요하다)에 더하여 해류, 바람, 파도의 일반적 상태, 해면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도로도 중요하다. 해변은 아무리 잘 선택한다 하더라도 모든 조건을 장기간에 걸쳐 충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2개의 거대한 인공부두를 영국 해협을 건너 운반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더 지형 및 기상 조건을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
(c) 해변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상당한 수용능력을 갖춘 수심이 깊은 정박용 항만이 있을 것(그 자체가 상호 관련된 일련의 요인에 의존하지만). 이와 같은 항만이 있어야 비로소 연합군의 대륙거점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특히 상륙용 주정 및 인공부두는 겨울이 되어 사용 불가능 할 때까지의 일시적 해결책에 불과하다.
(d) 공군의 지원. 연합군이 적의 작전을 방해하고 증원군 도착을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공군의 지원 여부에 달려 있다.


이 모델을 완성시킨 후, SHAEF (Supreme Headquarters Allied Expeditionary Force, 연합국 원정군 최고사령부) 참모장 프레더릭 E. 모건 (Frederick E. Morgan, 영국군 장교) 중장 휘화의 계획 담당자들은 지도를 보고 이런 조건들을 충족하는 유럽 내의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곧 모델 중에 설정된 조건이 종종 서로 모순되어 이상적인 상륙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략) 첫 번째 조건으로 우선 상륙용 주정과 기타 선박이 바로 돌아갈 수 있도록 상륙지점은 영국에 있는 연합군 주요 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되었다. 이 조건에 의해 자연히 지중해와 노르웨이가 배제되고, 프랑스 서해안만이 남았다. 둘째로 상륙지는 영국에서 출격하는 영국 공군의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의 행동반경 내에 있어야만 했다. 이들 2개의 조건을 종합하면 선택의 범위는 약 90% 정도 줄어들어 결국 프랑스 서해안 도버 해협의 파드칼레(Pas-de-Calais, 프랑스 북부) 아니면, 노르망디(Normaundie, 프랑스 북서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파드칼레는 독일에 가장 가깝고 가장 직접적인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파리를 지나 과감하게 동진하면 센 강 남쪽에 있는 모든 독일군을 고립시킬 기회도 있었다. 한편으로 그 곳은 가장 방어가 견고한 지역이었으며, 좋은 도로와 발달된 철도망을 이용해 빠른 증원이 가능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은 노르망디지만, 대서양을 향해 서쪽으로 돌출한 반도라는 지형으로 인해 프랑스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되기 쉬운 곳이었다. 하지만 이 조건조차도 초기 교두보를 획득한 후 돌파를 시도할 때는 마찬가지로 작용할 수 있었다. 

 

상륙지점을 선택한 후, 첫 90일간을 위한 세밀한 병참 계획이 작성되었다. 어디서, 언제, 얼마나 많은 부대를 어떻게 상륙시킬 것인가를 계획하고 이를 위해 해안의 장애물 제거와 작전 순서뿐만 아니라 폐기물의 처리장, 어떤 상륙방식에서 다른 상륙방식으로 전환 장소, 혹은 한 포장방식에서 다른 포장방식으로 바꾸는 시기까지도 (예, D+15일에는 POL(Petroleum(연료용 유류), Oil(유압용 유류), Lubricant(윤활유) 수송수단을 제리캔에서 드럼통으로 변경) 결정되었다. 수많은 품목을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로 하역시키기 위해 엄격한 우순순위가 정해졌다. 그에 따라 문자 그대로 모든 품목에 관해 저장, 청구, 포장, 인도, 분배의 상세한 순서가 결정되었다. (중략) 이 계획은 매우 광범위했기 때문에 완성까지 거의 2년이 걸렸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계획이 유례없이 규모가 컸고 또한 내용이 철저했으므로 작전의 승리는 대부분 잘 짜인 계획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상륙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큰 파도와 적의 맹렬한 저항으로 계획된 상륙은 실패로 돌아갔다. 항로를 착각하여 상륙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순서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공병대가 공격부대보다 먼저 해안에 도착하여 공격부대의 엄호없이 작업해야만 했기에 공병대는 인원과 장비 양면에서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중략)

 

P.357-358 노르망디의 상륙 지점이 브르타뉴(Bretagne, 노르망디 서쪽 위치) 반도의 여러 항구들, 특히 브레스트(Brest)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 오버로드 작전에서 선택된 주된 이유였는데, 결국 이들 항구는 예정보다 수개월이 더 지나서야 겨우 점령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전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랑샹(Grand-Champ)과 이시니(Isigny) 같은 항구들은 제 때에 점령되었으나 너무 규모가 작아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중략)

 

프랑스에서 연합군의 작전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인공부두가 제 기능을 못했어도 계획을 훨씬 상회한 보급물자를 해안에 상륙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계획을 무시한 덕분에 실행할 수 있었다. 최초로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한 것은 D+2일이었는데, 그 때 이미 결정된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모든 물자를 닥치는 대로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중략) 하역 작업은 무계획 상황에서 진행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계획과는 반대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계획 입안자들이 복잡하고 인위적인 준비를 과대평가했거나 현장에서의 상식, 또는 즉결처리능력의 효율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한다. 

 

보급 계획의 결점이 노출되는 것을 방지한 또 다른 요인은 소비량의 과대평가였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전술적 진행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늦어졌기 때문이다. D+19일까지 점령된 점령된 연합군의 거점은 계획의 10%에 불과했다. 그로 인해 보급품의 수송거리는 수십 마일밖에 되지 않았으며 차량들은 할당된 연료의 일부만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중략)

 

P.360-361 처음부터 오버로드 작전의 병참 계획은 독일군이 조직적인 방어전을 전개하여 강을 따라 점차적으로 저항선을 만들 것이라는 가정하에 작성되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전선은 1918년과 마찬가지로 완만하고 신중한 것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중략) 이와 같이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D+90일까지 센 강에, D+360일까지는 독일 국경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술적 전개는 매우 다른 형태를 취했다. 6월 25일(D+49일)에 연합군은 D+15일까지 도달할 예정이었던 선을 아직 일부밖에 점령하지 못했다. (중략) 계획된 지역을 제압하기 우위해서는 34일을 단축해야 했다. 그러한 단축이 가능한가를 밝히기 위한 연구가 SHAEF(연합국 원정군 최고사령부) G4(보급장교)인 크로퍼드 (Robert W. Crawford, 미국 장교, 아이젠하워 장군 휘하의 연합 원정군 최고사령부에서 보급 참모보좌관(G-4)으로 근무) 소장의 지시로 진행되었으나 결론은 실행 불가능이었다. 왜냐하면 D+90일에는 독일 육군의 중수송부대에 해당하는 임무를 맡을 병참트럭중대(Quartermaster Truck Company) 127개가 부족하게 될 것으로 여겨졌고, 빠르면 D+80일째에도 중대한 보급상의 곤란이 야기될 것으로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에 다행스러운 일은 결단력을 가진 지휘관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조지 패튼(George Smith Patton Jr.)은 대부분의 동료 지휘관과는 달리 병참담당자의 일정표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했다. 

 

P.364 노르망디에서 센 강까지의 연합군의 진격은 성공했고 전략적으로도 경이적이었지만 병참 면에서는 근대 전쟁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연합군은 다른 군대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많은 트럭 수송부대를 가지기만 한 것이 아니다. 기후가 좋은 여름철에 군사행동을 전개했고 세계에서 가장 정비가 잘 된 도로망 위에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 항공기의 활동은 거의 없었고, 우호적인 주민은 파괴활동을 하기보다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공세는 항상 병참담당자로부터 반대를 받고 있었다.

‘광역 전선’이냐 또는 ‘예리한 돌진’이냐?

병참선이 급속히 신장되었다.

보급품이 부족할 때면 항상 그러하듯 전선의 전투부대와 후방의 지원 조직 사이에서는 마찰과 긴장이 일어났다. (중략) 병참지역 (Zone of Communication) 내에서는 24시간 작업에 의한 긴장으로 피로, 사고, 꾀병 및 때로는 태업이 발생했다. 차량들은 정비하지 않은 채 사용하여 고장이나 수리소요가 급속히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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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7-372 파리는 8월 25일에 해방되고 말았다. 목표일로 설정된 9월 7일에 패튼과 호지스(Courtney Hicks Hodges)는 이미 센 강을 지나 200마일이나 전재해 있었다. (중략)


병참선이 급속히 신장되었다. 미군 지역의 병참선은 200~250마일에서 400마일 이상으로, 영국군 지역의 병참선은 80마일에서 300마일 가까이 늘었다. 이에 따라 병참지원은 보통의 일상적인 방법을 버리고 긴급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투부대는 가솔린과 식량을 최대한 휴대하고 전진했지만 조직적인 저항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뜻대로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급속히 전개해가는 전선에 맞추어 보급창을 설치하는 건 불가능하였다. (중략) 때로는 300마일이나 떨어진 기지로부터 긴요한 품목을 직접 운송해야 했다. 이와 같은 장거리를 운행할 수송부대는 중포대, 대공포대, 공병대, 화학부대 등에서 차출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 부대들은 차량을 빼앗겨 이동할 수도 없는 상태로 방치되면서 식량도 줄어들었다. (중략) 식량, 연료 및 탄약이 전방으로 수송되어 왔으나 피복 및 공병대 자재를 포함한 기타의 모든 보급품은 늦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이러한 비상수단에도 불구하고 전선에 도착하는 보급품의 흐름은 점차 줄어들어, 드디어 9월 2일에 제3군의 전진이 중지되었다. 제1군은 며칠 더 전진했으나 역시 정지하고 말았다. (중략)

 

보급품이 부족할 때면 항상 그러하듯 전선의 전투부대와 후방의 지원 조직 사이에서는 마찰과 긴장이 일어났다. (중략) 병참지역 (Zone of Communication) 내에서는 24시간 작업에 의한 긴장으로 피로, 사고, 꾀병 및 때로는 태업이 발생했다. 차량들은 정비하지 않은 채 사용하여 고장이나 수리소요가 급속히 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비하인드 스토리 

[전쟁사 읽어드립니다 EP.19] | 역사학자 임용한 박사

사피엔스 스튜디오

https://youtu.be/G8LcC8T5Mf4?si=XCUr7cqfSrbPmZsE

출처 :  사피엔스 스튜디오

 

상륙 작전은 대규모 항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1942년 8월 연합군은 상륙 예행 연습을 위해 디에프 상륙작전이라는 기습 작전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다. 이후 독일은 반드시 항구로 상륙해 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합군은 요새화된 항구에 상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항구가 없는 노르망디 해변을 목표로 상륙하고, 항구 시설이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발한 장비를 동원하기로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조립식 임시 항구'로 영국 해군 공학 전문가들이 철근과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속이 빈 부력 상자 2백개로 이루어진 인공 항구를 설계한다. 그리고 상륙한 후, 대서양 방벽을 돌파하기 위해서 쇠사슬을 휘둘러 지뢰를 터뜨리는 전차와 폭약통을 발사해 벙커를 파괴하는 전차 등 여러가지 신식 전차를 개발한다.

강력한 공군과 함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수많은 상륙정들이 썰물의 얕은 물가까지 접근한다. 독일군은 연합군이 밀물 때 상륙할거라 예상했기 때문에 대포들은 밀물의 만조선을 기준으로 조준되어 있었다. 그리고, 해안가에 매설한 물 밑 장애물도 썰물 시점에는 모두 드러났다.

 

역사상 다시는 없을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제2차 세계대전 35화) [지식스토리] 

https://youtu.be/MBJ0BHwAxo8?si=bqtyOEKbA0EJf1z2

연합국 최대의 뻘짓과 히틀러 최후의 발악 "마켓가든 작전과 벌지전투" 

(제2차 세계대전 36화) [지식스토리]

https://youtu.be/jOXaV3lPLyM?si=GaRNn760kjOpfkGT

지식스토리 Knowledge Story 이미지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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