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You can't manage what you can't measure" Peter Drucker
물류

[물류 관련 책]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4 : WW2 북아프리카 전투

by Vitaminymc 2024. 4. 7.
반응형

 

[ 보급전의 역사 (전쟁의 제1법칙 보급이 전장을 좌우한다)  ]


책의 4장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보급(병참) 역사를, 5장~7장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보급(병참) 역사를 다루고 있다. 
6장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북아프리카 전쟁을 다루고 있다.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주요 구절 ]

https://logistician.tistory.com/entry/%EB%AC%BC%EB%A5%98-%EA%B4%80%EB%A0%A8-%EC%B1%85-%EB%B3%B4%EA%B8%89%EC%A0%84%EC%9D%98-%EC%97%AD%EC%82%AC-Supplying-War-1

 

[물류 관련 책]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1

물류의 어원이 병참(logistics)이라는 측면에서, 군대의 물류체계에 대한 역사를 다룬 책이다. 모든 전공/학문의 개론(槪論)은 학문의 역사를 처음에 다룬다. 그 이유는 모든 학문이 철학에서 시작

logistician.tistory.com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6장 | 시르테에서 엘 알라메인까지
사막이라는 말썽거리
롬멜의 1차 공세
1942년 : 기적의 해
결론 : 아프리카에서의 보급과 작전
6. Sirte to Alamein
   Desert complications
   Rommel's first offensive
   1942: Annus Mirabilis
   Conclusion : supply and operations in Africa

[ 6장. 시르레테에서 엘 알라메인까지 ]

롬멜의 1차 공세

사막 전역에 숙달되지 않은 독일군은 경험 부족에 기인한 여러 가지 추가적인 문제들에 직면했다.
롬멜은 폭풍 같은 진격으로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롬멜이 직면하고 있던 어려움은 유럽에서의 보급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확장된 아프리카 내 병참선에 그 원인이 있었다.

더보기

P.309 사막에서의 작전은 영국이나 독일 모두 유용한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영국군이 비록 불충분하긴 해도 이집트에 제법 상당한 규모의 보급기지를 가졌던 반면, 독일군은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마저도 해상 운송에 의존해야 했다.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롬멜 부대가 소비한 물자는 모두 이탈리아에서 일일이 나무상자에 포장되어 지중해를 건너와야만 했다. 탄약, 유류, 식품 등 모든 것이 이러한 방법으로 수송되었고, 사막에서는 물조차도 종종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운반해 와야만 할 지경이었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엄청난 거리였다. 그것은 독일 국방군이 유럽에서 직면했던 거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독일-소련 접경선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폴란드령)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600마일(966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트리폴리(Tripoli, 리비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와 벵가지(Benghazi, 리비아의 제2의 도시) 사이의 거리(약 1000km)와 비슷하고, 트리폴리에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이집트에서 카이로 다음으로 큰 제2의 도시)까지 거리(약 1890km)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95센티미터의 궤간을 가진 선로를 제외하면, 이 광활한 공간을 지나는 방법은 해안을 따라 끝없이 뻗은 도로(Via Balbia, Libyan Coastal Highway)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 도로는 때때로 우기에는 홍수로 차단되었으며 항상 머리 위에서 배회하는 비행기의 좋은 목표가 되기도 했다. 이 도로를 별도로 친다면 남은 것은 사막 길뿐이었고 이도 차량의 왕복으로 마모가 매우 증가했다.


P.310 사막 전역에 숙달되지 않은 독일군은 경험 부족에 기인한 여러 가지 추가적인 문제들에 직면했다. (중략) 독일제 엔진, 특히 오토바이 엔진의 경우 과열되기 십상이었으며, 전차 엔진의 경우는 그 수명이 1400~1600마일 (2253~2575km)에서 300~900마일 (483~1448km)로 줄어들었다. (중략) 독일과 이탈리아의 장비는 표준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비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P.314 롬멜이 더 많은 증원 부대를 요구하거나, 혹은 300마일 한계를 초과하여 진격한다면 차량 부족 현상이 일어날 것은 필연적이었다. 또한 해안을 통한 해상 운송도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따라서 히틀러는 롬벨에게 수송차량들을 보내주면서, 더 이상의 지원을 필요로 할 어떠한 대규모 공세도 취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중략)


P.316-318 그 사이 롬멜은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4월 초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영국군에게 기습을 가해 그들을 리비아에서 축출하고 토브룩(Tobruk, 토브루크, 리비아의 북동쪽 끝 부분에 위치한 항구도시, 이집트 국경과 인접)를 포위했다. 제1차 공격에서는 영국군을 토브록에서 축출하지는 못했으나, 결국은 이에 성공하여 이집트 국경 너머에 있는 살룸(Sallum, 리비아 국경에서 동쪽으로 8km, 리비아 토브룩에서 128km에 위치)까지 진격했다. 롬멜의 이러한 전격적인 공격은 전술적으로 훌륭했지만 전략적으로는 대실패였다. 왜냐하면 결정적 승리도 거두지 못한 채, 그러지 않아도 늘어나 있는 병참선에 다시 700마일(1127km)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서 발생한 부담은 OKH(육군 최고사령부, Oberkommando des Heeres)가 예언한 대로 롬멜의 후방부대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중략) 지원 물량이 가장 많았던 5월에도 아프리카로의 수송 중에 손실된 것은 선적된 보급물자의 9%에 불과했다. 2월에서 5월에 이르기까지 롬멜 및 이탈리아군은 평소 소비량보다 4만 5000톤이나 많은 32만 5000톤의 물자를 공급받았다. 하지만 일단 공세가 시작되자 휘하의 수송수단만으로는 트리폴리에서 전선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연결하기가 힘들어졌다. 그 결과 항구에서는 물자가 쌓여가는 한편 전선에서는 물자가 부족한 상태가 발생했다. (중략) 4월 4일 추축군이 이집트 국경에서 불과 300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벵가지항을 재점령했지만 사태지 그다지 개선되지 못했다. 1개월에 5만 톤의 해상 수송을 목표했으나, 실제로 수송된 것은 불과 1만 5000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벵가지항은 이론상 1일에 2700톤의 하역이 가능했지만 영국 공군의 비행거리 내에 있었기 때문에 공습을 피할 수 없었다. 하역된 화물이 700~800톤에 도달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을 뿐, 보급물자는 계속하여 트리폴리에 쌓여가면서 롬멜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롬멜은 폭풍 같은 진격으로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중략)


P.321-322 롬멜이 직면하고 있던 어려움은 유럽에서의 보급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확장된 아프리카 내 병참선에 그 원인이 있었다. (중략) 11월이 되자 필연적인 위기가 발생했다. 11월 9일 밤 2만 톤의 물자를 싣고 가던 5척의 수송선단이 봉 곶(Cape Bon, 튀니지 북동쪽 위치한 곶 : 바다 또는 호수 쪽으로 튀어나온 모양의 육지)에서 영국 함대에 의해 모두 격침되었고 이후 이탈리아군은 트리폴리항이 실질적으로 폐쇄되었다고 선언했다. 11월에 건너온 보급물자는 3만 톤이라는 참담한 숫자로 떨어졌고, 선박 손실은 30%로 증가했다. (중략) 전선의 유지가 불가능해 12월 4일 롬멜은 총퇴각을 명령했다. 

1942년 : 기적의 해

병참선이 짧아지면서 롬멜은 보급상황은 호전되었다. 
OKH는 롬멜에게 또 다시 공격할 경우 보급 상황은 엉망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롬멜은 이탈리이군 최고사령부에서 어떻게 보급을 유지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롬멜은 자신도 모르겠다고 시인하면서 하여간 병참업무는 전술적 상황에 적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롬멜은 전쟁에 졌음을 깨달았다. 

더보기

P.327-328 1942년 1월, 롬멜은 여전히 방어하기에 넓은 지역을 갖고 있었다. 병참선이 짧아지면서 롬멜은 보급상황은 호전되었다. (중략) 롬멜이 공격을 재개한다면 병참상의 난제들이 다시금 고개를 들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리는 없었다. 따라서 롬멜은 자신의 수송부대에 8000대의 수송차량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시 러시아에서 작전 중이던 독일군 4개 기갑군이 가진 수송차량을 전부 합쳐봐야 고작 1만 4000대뿐이었기 때문이다. OKH는 이 요구를 거부하고 롬멜에게 또 다시 공격할 경우 보급 상황은 엉망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롬멜은 두 번이나 경고를 무시하고 재차 전격전을 개시한 후, 1월 29일 벵가지에 재입성했다. (중략) 2월 9일에 이미 전투부대의 요구를 100% 보장할 수 없었고, 다음 날에는 전술적 전개 때문에 보급능력은 더욱 저하되어, 결국에는 엄청난 수송거리와 만성적인 차량 부족으로 이미 전진한 부대에 탄약이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P.329 벵가지 동쪽에는 항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공격 속행은 새로운 위기를 불러올 것이었다. (중략) 롬멜은 이탈리이군 최고사령부에서 어떻게 보급을 유지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롬멜은 자신도 모르겠다고 시인하면서 하여간 병참업무는 전술적 상황에 적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5월 하순에 롬멜이 공격을 개시, 토브룩을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롬멜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되며 독일 공군이 몰타 섬을 점령하기 위해 재전개할 수 있도록 6월 20일까지 작전을 완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P.336 롬멜은 8월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3만 톤의 연료 중에서 겨우 8000톤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나일 강을 향후 최후의 돌파를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롬멜은 이집트 알람 할파 (Alam el Halfa)에서 4일간 격렬한 전투를 치른 다음 결국 출발시점으로 되돌아왔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롬멜은 전쟁에 졌음을 깨달았다. 

결론 : 아프리카에서의 보급과 작전

롬멜이 직면한 문제가 유럽에서의 물자보급이 단절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프리카 내륙에서의 연료 수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아프리카 내륙에서의 병참선 확보의 대부분의 책임은 롬멜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때는 늦은 것이었다.

“군대가 전투의 긴장을 견뎌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조건은 
무기, 석유, 탄약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다. 
사실 전투는 발포가 있기 전에 이미 보급장교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 
아무리 용맹한 병사라 하더라도 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총은 충분한 탄약 없이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리고 기동전에서는 차량과 그것을 움직이는 석유가 충분하지 못하면 
총도 탄약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보급품은 적군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거의 동등해야 한다.” 
-The Rommel Papers-

 
롬멜의 여러 차례에 걸쳐서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기지에서 지원할 수 있는 거리를 넘어 진격을 시도했는데, 이는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 될 실책이었다.

더보기

P.340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 내륙에서 주파해야만 하는 긴 수송거리였다. 이는 러시아를 포함, 이제까지 독일 국방군이 유럽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긴 거리였으며, 더욱이 그 거리를 연결할 차량의 수도 적었다. 1942년에는 소규모 연안 수송도 실시되었으나, 영국 공군이 제공권을 쥐고 있는 한 그 효과는 제한되어 있었으며, 항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공급에 노출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엔노 폰 린텔렌 (Enno von Rintelen) 장군이 오직 철도만이 보급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적한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 (중략) 롬멜은 그것(철도)을 기다릴 만큼 이내심을 갖고 있지 못했다.


P.341-342 롬멜의 패배는 이탈리아에서 연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든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유조선이 대량으로 격침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종종 있다. (중략) 이는 롬멜이 직면한 문제가 유럽에서의 물자보급이 단절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프리카 내륙에서의 연료 수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중략) 아프리카 기갑군은 전차와 중포에 있어서 영국군보다 사실 상 우세했다. 이러한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롬멜은 같은 수준의 규모와 중요성을 가진 다른 독일 군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차량을 지원받았다. 아프리카 내륙에서의 병참선 확보의 대부분의 책임은 롬멜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때는 늦은 것이었다.
“군대가 전투의 긴장을 견뎌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조건은 무기, 석유, 탄약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다. 사실 전투는 발포가 있기 전에 이미 보급장교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 아무리 용맹한 병사라 하더라도 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총은 충분한 탄약 없이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리고 기동전에서는 차량과 그것을 움직이는 석유가 충분하지 못하면 총도 탄약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보급품은 적군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거의 동등해야 한다.”
(중략)
롬멜의 여러 차례에 걸쳐서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기지에서 지원할 수 있는 거리를 넘어 진격을 시도했는데, 이는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 될 실책이었다.


2차세계대전의 영웅, 사막의 여우 롬멜은 어떻게 탄생했을까(2부)

 
4분 50초 부터
https://www.youtube.com/watch?v=csOwCSEwtrs&t=291

1941년 2월 11일 롬멜은 아프리카 리비하로 간다.
2월 14일부터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이 트리폴리 항구를 도착하기 시작했고, 새롭게 개발된 4호 전차 또한 롬멜의 부대에 보급되었다.
베를린에서는 롬멜의 돌발행동을 방지하기 위해 아프리카 군단의 임무는트리폴리 수비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하지만 롬멜은 지휘부의 명령을 어기고, 3월 24일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사막의 특성상 보급 포인트는 제한적이고 보급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극심한 소모를 경험하게 된다.
해안가를 따라 병참도로구 구성되어 있는데 공군과 해군의 공격에 취약하다.
4월 3일, 빼앗겼던 벵가지를 다시 점령하게 된다.
반면에 영국군은 토브룩 방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전선과 보급로가 길어지면서 북아프리카로 들어가는 자원이 많아지자, 사태 파악을 위해서 독일 사령부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을 아프리카로 보낸다. 그는 롬멜이 진격할수록 보급선이 길어지고 있고, 연합국 함대의 견제로 근처에 있는 항구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 토브룩 공격 이후에는 더 이상 전선을 늘리지 말라고 재차 경고한다.
영국은 배틀맥스 작전과 크루세이더 작전을 통해 롬멜을 계속 압박했고, 연합국의 공군 전력 또한 2배 이상 늘어나면서, 보급의 한계를 느낀 아프리카 군단은 뒤로 밀려나게 된다.
1941년 6월 11일 독소전쟁이 발생하면서 막대한 양의 보급품과 병사들이 투입되면서, 아프리카로 보내는 보급품은의 양을 줄이게 된다.
이에 롬멜은 베를린으로 돌아가 히틀러를 만나고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이집트를 점령하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점령할 수 있고, 거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서 캅카스 지역 점령 가능) 히틀러는 롬멜의 계획을 동의했고 연합군의 수송선 습격을 막기 위해 몰타 섬을 집중적으로 공습하기로 한다.
1942년 5월 26일,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은 다시 진격을 시작한다. 영국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6월에는 토브룩을 점령한다. 롬멜은 최연소 원수로 진급한다.
6월 23일,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은 이집트 국경을 넘었고, 영국군은 최대한 병력 손실을 줄이고 지연전을 준비하며 후퇴했다. 6월 30일 롬멜의 부대는 엘알라메인 방어선에 접한다. 독일군은 제대로 증원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 공군의 공습으로 기동 가능한 전차도 약 50대 정도였다.
엘알라메인 전투는 11월까지 진행되면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완벽하게 소모시키고, 독일군은 서쪽으로 밀려 나간다.
바다로 들어오는 추축국 의 유조선은 계속 겸침을 당해서 전차 연료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롬멜은 본국에 제대로 보급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제기하였으나, 동부전선의 상황으로 독일은 여유가 없었다.
결국 롬멜은 후방으로 철수를 결정한다. 그런데 롬멜이 패배를 인정하고 후퇴한다고 하자, 히틀러는 공중 지원과 보급품 전달을 약속하며, 후퇴를 반대한다.
그러나, 영국군의 진격에 따라 롬멜은 후퇴를 결심하게 된다.
연합국 "횃불작전"에 따라, 북아프리카 전역이 미군과 영국군이 상륙하기 시작하면서,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은  전선이 양쪽으로 생기게 된다. 결국 밀리고 밀린 아프리카 군단은 튀니지로 후퇴하였고, 연합군이 트리폴리로 입성하게 된다.
롬멜은 직위 해제를 당하고 본국으로 소환된다. 이후 남아있던 추축국 병력들은 1943년 5월 13일 항복한다.

 

제2차 세계대전 북아프리카 현황 출처 :  https://www.youtube.com/@bigsibas
제2차 세계대전 엘알라메인 방어선 출처 :  https://www.youtube.com/@bigsibas
제2차 세계대전 북아프리카 영국군 진격 출처 :  https://www.youtube.com/@bigsibas
제2차세계대전 연합국 북아프리카 상륙 출처 :  https://www.youtube.com/@bigsibas
제2차 세계대전 북아프리카 독일군 튀니지 후퇴 출처 :  https://www.youtube.com/@bigsibas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이탈리아 진격 출처 :  https://www.youtube.com/@bigsibas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