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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

[물류 관련 책]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3 : WW2 독소전쟁

by Vitaminymc 2024.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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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급전의 역사 (전쟁의 제1법칙 보급이 전장을 좌우한다)  ]


책의 4장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보급(병참) 역사를, 5장~7장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보급(병참) 역사를 다루고 있다. 
5장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소전쟁을 다루고 있다.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주요 구절 ]

https://logistician.tistory.com/entry/%EB%AC%BC%EB%A5%98-%EA%B4%80%EB%A0%A8-%EC%B1%85-%EB%B3%B4%EA%B8%89%EC%A0%84%EC%9D%98-%EC%97%AD%EC%82%AC-Supplying-War-1

 

[물류 관련 책]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1

물류의 어원이 병참(logistics)이라는 측면에서, 군대의 물류체계에 대한 역사를 다룬 책이다. 모든 전공/학문의 개론(槪論)은 학문의 역사를 처음에 다룬다. 그 이유는 모든 학문이 철학에서 시작

logistician.tistory.com

보급전의 역사 Supplying War
5장 | 러시안 룰렛
반차량화된 군대의 문제
바르바로사 작전의 계획
레닌그라드와 드네프르
모스크바 문 앞의 폭풍
결론
5. Russian roulette
   Problems of the semi-motorized army
   Planning for 'Barbarossa'
   Leningrad and the Dnieper
   'Storm to the gates of Moscow'?
   Conclusions

[ 5장. 러시안 룰렛 ]

반차량화된 군대의 문제

문제는 히틀러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분야에 있어서도 세부적인 행정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았으며, 또한 장기 계획을 수행할 인내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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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4~245 1933년 1월, 히틀러는 집권하면서 독일인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현대화와 기계화를 확고히 공약했다. (중략)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나치(Nazi)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영문명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은 항상 자동차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정당대회, 가두행렬, 정치적 선전 등에 자동차를 많이 이용했다. (중략) 히틀러 자신도 자동차를 좋아했고, 자동차에 관한 기술과 구조에 관한 놀라울 정도의 식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자동차를 움직이는 엔진,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 자동차가 사용할 도로를 만드는 데 생생한 관심을 보였다. (중략) 문제는 히틀러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분야에 있어서도 세부적인 행정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았으며, 또한 장기 계획을 수행할 인내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중략) 히틀러는 거창한 구경거리와 조급한 결과만을 기대하면서 장식적, 상식적인 측면과 전술적인 측면 두 가지 가치에 치중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였다. (중략) 

 

P.246~247 철도는 야지에서 기동작전을 지탱하기에는 융통성이 부족했다. 전술적 돌파를 달성해도 보급부대가 뒤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히틀러와 그의 휘하 장군들은 이를 위한 보다 융통성 있는 병참수단, 궤도식 장갑차량과 수송차량에서 미래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술을 찾았다. 육군 보급부대의 차량화가 야지에서의 승리를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는 판단이 올바른 것이라 할지라도 전략적으로 어떤 이익이 있는지는 의심스러웠다. 1939년 당시의 기술적 조건하에서는 단 하나의 복선철도의 능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수송차량 1600대가 필요했으며, 연료, 인원, 예비 부품의 유지비 등은 감안한 실질 적재량을 비교해보면 200마일 (322km) 이상의 거리에서는 철도가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차량화 작전과 전술적 목적에는 매우 중요한 반면 전략적 효과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중략) 군대를 차량화하겠다는 히틀러의 결정은 그로 하여금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만들었다. 관계 경비의 지출에서도 철도가 상대적으로 경시되었기에 1914~1934년 사이의 기관차와 화차의 총 대수는 감소했다. 동시에 독일의 자동차산업도 민간수요에 더해 새로이 군의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 발전되지 못했다. 1939년 9월 1일 당시 독일의 도로상에 산재한 모든 종류의 4륜차량은 100만대로 인구 70명당 1대의 비율이었다. 이에 반해 미국에는 10명당 1대의 차가 있었다. 더욱이 차량화는 독일이 갖고 있는 석탄과 철강이 아니라 독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고무와 기름을 필요로 했다. (중략) 

 

P.248 독일 국방군은 철도변의 대규모 철도종단점과 부대를 연결하기 위해 총 9000명의 인원과 6600대의 차량으로 구성된, 1만 9500톤의 수송능력을 가진 3개 연대 규모의 중수송부대를 갖고 있었다. 1944년 연합군이 프랑스에서 47개 사단을 유지하기 위해 6만 9400톤 이상의 수송능력을 가진 차량화 수송부대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물자부족을 겪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차량을 획득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민간차량을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자동차의 종류는 매우 다양해졌고 더욱이 그 자동차 모두에 예비부품을 계속 공급해야 했으므로 관련 소요는 전쟁기간 내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중략) 독일군이 부분적으로 차량화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또 다른 문제는 동질성의 결여였다. 독일군의 군용차량은 몇몇 부대에만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군대 안에 서로 다른 두 성격을 가진 부대가 존재함을 의미했다. 하나는 차량화된 고속부대이며 또 하나는 도보에 의존하는 느린 부대였다. 전자가 후자를 추월하는 경우 이러한 이질적인 두 부대의 상호 협동은 매우 어려웠다. (중략) 독일 국방군 편제 또한 결점이 있었다. 전시에는 철도에 의한 모든 교통이나 국내 수로에 의한 모든 수송은 루돌프 게리케(Rudolf Gercke)장군의 지휘하에 있었다. 그는 육군 최고사령부(OKH : Oberkommando des Heeres)의 수송국장이면서 동시에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 Oberkommando der Wehrmacht)의 국방군 수송국장이었다. 하지만 주요 병참선의 중수송부대는 게리케가 아니라 보급품이 수송에 대한 책임 있던 OKH의 병참감 에루아르트 바그너(Eduard Wagner) 장군에 의해 통제되었다. 이렇게 육군에 대한 병참지원은 두 당국에 의해 분리되었는데 하나는 보급 파이프의 양 끝을 통제하고, 다른 하나는 그 가운데를 장악하고 있었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게르케 장관의 권한이 해군이나 공군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략)


P.250~252 1939~1940년의 군사행동은 단기간이고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았지만 지금까지 기술한 모든 문제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대폴란드 전에서는 철도의 파괴가 극심했기에 병참 체계는 폴란드의 조기 항복으로 경우 붕괴를 모면할 수 있었는데 도로 또한 극히 불량한 상태로 변했기 때문에 차량 수송중대의 차량 손실은 50% 이상에 달했다. 이러한 손실을 보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략) 프랑스 뫼즈(Meuse) 강을 넘어 전형적인 공격(보병사단으로 공격 시작, 고속부대는 적진 돌파와 그 확대에 이용)을 하게 되면 아르덴(Ardennes) 고원을 가로지르는 소수의 도로가 보병사단에 차단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공격은 기갑부대와 차량부대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도 기갑부대가 너무 빨리 기동했기 때문에 –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은 5일로 계획한 것과 달리 3일 만에 뫼즈 강에 도착 – 보병사단과 사이에 간격이 벌어졌다. (중략) 전역 첫 단계에서 독일군은 벨기에 내의 영불 연합군을 포위, 격멸했지만 베강 라인 (Weygand Line, 프랑스 솜(Somme)과 엔(Aisne)을 따라 위치한 새로운 프랑스 전선)에 대한 진격을 계속하기 위해선 재보급을 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를 위해 브뤼셀, 릴, 발랑시엔, 샤를루아, 나무르 지역에 전진보급기지를 설치하려 했다. 그러나 철교나 터널, 고가 교량의 파괴가 1914년만큼이나 극심했기 때문에 보급기지 설치 계획은 더욱 어려워졌다. 에루아르트 바그너(Eduard Wagner)는 5월 20일경 제국 운수장관으로 승진하자 독일의 모든 수송차량을 즉각 자신의 휘하에 둘 것을 요구했다. (중략)  벨기에에 세워질 새로운 전진보급기지의 건설을 감독하기 위해 특별참모가 브뤼셀에 파견되었으며 5월 22일에는 작업 개시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보고되었다. 바로 그날 네덜란드에 총 1만 2000톤의 물자가 중수송부대에 의해 발송되었다. 그와 동시에 바그너는 안트베르펜행 열차와 뒤스부르크-브뤼셀 간의 수송 운송을 이용했다. 그의 노력으로 독일군은 6월 5일 공격을 재개할 수 있었다. (중략)
많은 물자, 특히 탄약의 소비량은 정상적이었지만 빠르게 전진하는 기갑부대에 대한 보급상의 어려움은 상당한 것이어서, 적절한 시기에 적의 연료를 대량으로 노획하지 못하면 항공 수송을 하거나 기갑부대의 공격을 멈춰야 했다. 행군 규율의 결여로 마차와 자동차가 같은 도로를 사용한 결과 도로는 혼잡해졌고, 때로는 봉쇄되기도 했다. 파괴된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었지만 철도부대가 너무 적어 효율적으로 작업하기 어려웠고 민간 철도회사에서 지원된 요원은 능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군사행동이 진행되는 동안 히틀러는 육군의 보급 체계를 완전히 재편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어떤 마술로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자동차 산업과 연료의 불안한 공급 같은 독일의 근본적인 취약점을 보완할 수는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이 명령은 부적절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계획

*바르바로사 작전 (Operation Barbarossa) :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위한 작전 (1941년 6월 22일 침공)

예비 부품 확보 문제는 러시아로 진격하는 독일군이 2000여종의 각기 다른 형태의 차량을 사용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해결이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탄약의 소요량 예측이었다. 이는 요구량이 아니라 수송가능 여부에 달려 있었다.

 1년전 서부전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수송차량에 의한 보급에 의존해야 했으나 수송차량은 변함없이 공급 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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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3~255 히틀러의 소련 침공에 관한 수천 권의 책 중에서 독일군의 실패를 부분적으로나마 병참(주로 거리와 상태가 좋지 못한 도로에서 비롯되는 어려움) 탓으로 돌리지 않은 책은 아마도 한 권도 없을 것이다. (중략)
히틀러에게는 이러한 문제들 (진격 계획, Route 등) 중 어느 하나도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의 장군참모들이 기안했던 전술, 전략, 병참 문제에 대해 히틀러는 경제적, 이념적 문제를 부가시켜 무엇보다도 먼저 식량을 확보하고 캅카스 (Kavkaz, Caucasus,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산악지역)에서 석유를 획득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진격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중략) 히틀러가 하달한 기본 작전 명령인 ‘총통지령 제21호’는 3개 군집단이 드비나-스몰렌스크-드네프르를 경유하여 각각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로 향하라는 복잡한 내용을 담게 되었다.
병참의 견해로 돌아와, 병력은 거의 350만으로 이는 1812년 네만 강을 도하한 나폴레옹 군대의 5배를 넘었고, 여기에 수십만의 말과 차량들을 포함한 거대한 집단이 출발기지에서 600, 700, 900마일 떨어진 목적지를 향해 전진하며 행군 중에도 보급품이 지원되어야 한다. 이 모든 작전이 벌어지는 지역은 도로의 수가 적고 그 상태가 나쁘기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철도는 매 야드마다 궤간을 바꾸지 않으면 활용할 수 없었다. 더욱이 독일군이 지원받도록 계획된 상당한 양의 주요 전략물자들(석유에서 고무까지)의 공급이 작전 개시와 동시에 단절되는 상황에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P.256~257 소련 공격 입안자들에게 이러한 물자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난제 중 하나였다. 항상 그렇듯이 첫 번째 어려움은 얼마나 많은 양이 필요한가를 결정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작전의 전개속도(연료 소비량에 영향을 미침), 적의 저항(탄약 소모량에 영향을 미침), 작전의 지속시간을 포함한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요인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사실 담당 참모들은 낙관적인 가정을 많이 세웠다. (예. 탄약 소비량은 서부전역 때와 비슷할 것이거나 소련군을 드비나-스몰렌스크-드네프로 전의 서쪽에서 패배시킬 수 있다 등) 낙관적인 가정을 세웠다 해도 여전히 구하기 힘든 물자가 있었다. (예. 타이어, 연료) (중략) 이 문제(예비 부품 확보)는 러시아로 진격하는 독일군이 2000여종의 각기 다른 형태의 차량을 사용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해결이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탄약의 소요량 예측이었다. 이는 요구량이 아니라 수송가능 여부에 달려 있었다. (중략) 독일군 수뇌부는 최초의 목표를 제한된 수단에 맞춰 신중하게 조정한 것이 아니라 계산이 지나칠 정도로 신중했다며 처음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목적이 달성될 것이라 자만한 것이다. 하지만 상기 문제점들에 암운을 던진 것은 작전 유지에 필요한 충분한 수송수단을 얻기가 어려웠다는 데 있다. 군사행동은 그 규모 때문에 오직 철도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지만 소련 철도의 궤간은 독일과 달라서 철도의 즉각적인 이용이 불가능했다. (독일 1435mm 표준궤, 소련 1524mm 광궤) (중략) 그래서 1년전 서부전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수송차량에 의한 보급에 의존해야 했으나 수송차량은 변함없이 공급 부족이었다. 후방보급부대를 재편성하여 그 차량을 거두어들이고 스위스에서 수송차량을 사들이기도 하며, 프랑스군 노획 차량과 교체한 민간 수송차량 등을 모두 더해 OKH는 3개 군집단 후방에 평균 2만 톤이라는 필요한 최소량의 물자를 그런대로 충당한 중수송부대를 배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예비품을 전혀 확보할 수 없었고, 수송력의 극심한 부족으로 75개 보병사단은 각기 200대의 짐수레 (소나 말이 끄는 농업용 수레)를 지급받지 않으면 안 될 실정이었다. (중략)

레닌그라드와 드네프로

군사행동은 진보한 시대의 기술적 수단으로 수행하는 반면에 보급은 이전 시대의 낡은 기술적 수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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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3~268 1941년 6월 22일 오전 3시. 발트 해에서 헝가리 북부까지 800마일 (1287km)에 이르는 소련과의 국경을 따라 배치된 독일 육군 144개 사단의 포병대가 포격을 시작하면서 사상 최대의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의 전략과 전술, 양면에서 완전한 기습을 달성하여 적의 초기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일부 고립된 지대를 제외하면 소련 국경수비대에 의한 저항은 수시간 내에 무너졌고 기갑사단에게는 전속력으로 전진할 수 있는 길이 열려서 최초에 계획한 포위에 성공했다. 그러나 보병과 마차수송대의 대집단은 열심히 전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뒤쳐지게 되었다. (중략) 병참기구는 작전 상황의 결과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미리 예상한 가정에 따라 상황을 앞서갔다. 이것은 아마 근대전쟁사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일 테지만,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일 국방군이 취해야만 했던 필사적인 방식이었다. (중략) 중수송부대의 가동률이 급격이 줄어드는 것과 더불어 러시아의 조건 자체가 나머지 수송차량의 운행을 곤란하게 했다. 즉 도로 상태가 나빴기 때문에 연료 수요가 증가, 당초에 예상한 1개월당 25만톤에서 33만톤(1일 9000톤)으로 늘어난 것이다. (중략) 엔진은 가혹한 가동으로 인해 급격히 소모됐고 가솔린에 대한 엔진오일 소비량은 2%였던 것이 5~7%까지 늘었다. 독일 국내의 고무 재고량이 급속히 저하되면서 예비부품, 특히 타이어의 수급이 극히 힘들어졌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중수송부대의 실제 가동률은 예상보다 훨씬 저하되어 전선이 철도선에서 60마일 (96.6km) 이상 떨어질 때마다 작전의 보급이 곤란해졌다. (중략) 철도 궤간 변환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작업을 맡은 부대는 철도 부근의 적부터 몰아내야 했다. 군사행동은 진보한 시대의 기술적 수단으로 수행하는 반면에 보급은 이전 시대의 낡은 기술적 수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중략) 궤간 변환에는 시간이 걸렸으며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독일식으로 궤간을 변환하면서 낡은 소련제 철도 자재를 사용했는데, 재활용한 소련제 레일은 독일제에 비해 단위당 중량이 가볍고 침목의 수도 3분의 1이 적었기 때문에 궤간 변환작업이 이루어진 선로 위로 대형기관차가 달리지 못했다. (중략) 또한 러시아산 석탄은 질이 나빠서 독일산 석탄이나 가솔린을 첨가하지 않으면 독일제 기관차에 사용할 수 없었다. 신호 및 통신장비는 퇴각하는 소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중략) 소련의 연료는 액체든 고체든 할 것 없이 모두 독일 것과는 종류가 달라서 최소한의 조정을 하지 않으면 사용이 불가능했다. 물론 소련의 식량은 완전히 사용할 수 있었지만 퇴각하는 붉은 군대는 보급창을 만들지 않고 각 부대에서 온 차량에 열차에서 직접 식량을 배급했다. 이것은 노획할 수 있는 보급창의 수가 적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P.276 게오르크 한스 라인하르트(Georg-Hans Reinhardt) 부대(41기갑군단)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에서 80마일 이내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7월 중순에는 보급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공격을 바로 재개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했다. 에리히 회프너(Erich Hoepner) 부대(4기갑군단)는 전투개시 후 최초 2주일간 자기 계획대로 작전했으나 그 무렵 강력한 적과 조우했고, 그로 인해 탄약의 소비량의 증가했고 추가 보급이 어려웠다. (중략) 7월 후반이 되면서 중수송부대는 극히 소규모의 공격조차 지원할 수 없었다. (중략) 이러는 동안 공격개시는 7번이나 연기되었다. (중략) 8월 8일 공격이 개시되었으나, 이때 레닌그라드는 방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곧 시작된 호우로 인해 모든 길은 늪지로 변해 전투부대의 탄약보급이 어려워졌다. 9월 11일이 되자 히틀러는 지형이 전차 운용에 적합하지 않다고 인정하고, 제4기갑군단의 철수를 명하여 모스크바 최후 공격으로 전환시켰다. 이 결정과 동시에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공군이 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로써 마지막 기회를 잃게 되었다. 

 

P.277 게르트 폰 룬트슈테르(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원수 휘하 남부군집단의 작전 목표는 북부군집단보다 더욱 애매하고 잡다했다. 작전목표에는 크림반도의 점령 외에 우크라이나의 곡물, 도네츠의 석탁, 캅카사의 석유 탈취가 포함되어 있었다. (중략) 남부군집단은 다른 무엇보다도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아 7월 19일까지 수송부대의 거의 반수가 작동불능 상태에 빠졌다. 다음 날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군대를 보급 곤란에서 구출해내기 위해 수레보급대가 편성되었다. (중략) 

모스크바 문 앞의 폭풍

주파한 거리가 워낙 멀었기 때문에 작전 개시 10일 후에는 예비 부품의 부족으로 전차의 손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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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3~284 1941년 6월 22일에 히틀러가 러시아로 진격시킨 3개 군집단 중 가장 강력한 것은 페도르 폰 보크(Moritz Albrecht Franz Friedrich Fedor von Bock) 원수 휘하의 중부군집단이었다. (중략) 6월 22일 소련 국경수비대의 저항을 제압한 후 보크의 부대는 여세를 몰아 두 개의 기갑집단, 특히 우익에 있던 구데리안 휘하의 제2기갑집단을 앞세워 러시아 영토 깊숙이 빠르게 진격해갔다. 이 지방은 우크라이나에 비해서는 기갑부대 운용에는 적당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북쪽의 회프너 부대에 비하면 정세가 훨씬 단순했다. 그러나 도로는 적고 전진은 무질서했다. (중략) 7월 16일 기갑부대들은 스몰렌스크에서 재회했다. 이와 같은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보급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문제에 봉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주파한 거리가 워낙 멀었기 때문에 작전 개시 10일 후에는 예비 부품의 부족으로 전차의 손실이 생겨났다. 보병부대가 뒤따라 올 때까지는 몇 주일이나 걸렸으며, 기갑부대는 기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서 적의 반격을 격퇴하고 있었다. 전투가 수세로 몰리자 연료의 소비량은 급격히 감소한 반면 탄약의 소비는 급격히 늘어 여러 차례 위기가 닥쳤다.


P.285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언제나 보급 임무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철도뿐이었지만 그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도로 중심의 독일식 전투 방식 때문에 철도선의 대부분이 정비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고 철도 수비대는 수가 너무 적어 상황에 대체할 수가 없었다. (중략)

 

P.287 8월 내내 중부군집단은 동쪽에서 적의 반격에 직면했었다. 보크군의 전진이 멈추려 할 때 OKH와 히틀러는 작전 지속의 여부에 관해 커다란 견해 차이를 보였다. OKH는 모스크바 진격으로 붉은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할 것을 주장했다. (중략)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밀, 도네츠의 석탄과 철강, 캅카스의 석유, 그리고 크림 반도의 점령에 매우 강한 관심을 표명했다. 

결론

독일군의 소련 침공은 단일 군사작전으로는 사상 최대였으며 그에 수반하는 병참상의 문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독일 국방군의 내용은 너무나 평범했다. 독일군이 작전목표 가까이에 도달한 것은 준비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장병들의 의지 덕분이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시련을 극복하려 했으며 가능한 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활용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에서 입성하지 못한 요인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진흙탕에 기인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악천후로 인해 진격이 2-3주 지연된 것은 사실이다. 10월 중 철도 가동률은 절망적인 선까지 저하되었다. 그리고 연료보급은 독일 본국에서의 부족으로 인해 제로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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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6 독일군의 소련 침공은 단일 군사작전으로는 사상 최대였으며 그에 수반하는 병참상의 문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독일 국방군의 내용은 너무나 평범했다. 독일군이 작전목표 가까이에 도달한 것은 준비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장병들의 의지 덕분이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시련을 극복하려 했으며 가능한 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활용했다.
러시아의 군사행동에서 독일군은 결코 충분한 수단을 갖지 못했고, 이는 전투부대보다 원료나 예비물자 및 수송수단에 있어서 더욱 심각했다. 차량을 유일한 수송수단으로 삼아 모스크바에 도달하는 데는 실제로 사용한 것보다 최소한 10배의 차량이 필요했으리라 추정된다. 동시에 철도부대 또한 그 수가 충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장비와 훈련도 부족했다. 


P.297 대부분의 차량을 기갑집단의 배후에 집중시키고 군사행동 초기에는 보병부대가 별다른 전투를 하지 않은 덕분에 독일 국방군은 북쪽에서는 루가, 남쪽에서는 드네프르 강, 중부에서는 스몰랜스크까지 전진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 지점에서 작전은 중지되었다. 북부군집단은 새 기지 건설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레닌그라드 점령 희망이 사라졌다. 남부군집단에서는 상황이 너무나 곤란해 적당한 기지를 완성하지 못한 채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드네프르 강 동안의 작전은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작적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정지했다. 중부군집단은 거의 2개월을 들여서 전진보급기지를 설치했으나, 그래도 일부 중요 물자들, 특히 예비 부품, 타이어, 엔진, 오일 등의 공급이 항상 부족했다. 병참 상황의 악화로 8월말에 중부군집단에 의한 모스크바 진격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P.298-299 독일군이 모스크바에서 입성하지 못한 요인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진흙탕에 기인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악천후로 인해 진격이 2-3주 지연된 것은 사실이다. 10월 중 철도 가동률은 절망적인 선까지 저하되었다. 그리고 연료보급은 독일 본국에서의 부족으로 인해 제로에 가까웠다. (중략) 결빙이 시작되었을 때는 차량 수송부대보다도 철도 쪽이 더 피해가 심했다. 차량 수송부대는 11월이 되었어도 임무를 계속 완수하고 있었으나, 철도는 기관차의 부족으로 그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깝게 저하되었다.


P.302 독일 본국으로 화제를 돌린다면 차량의 손실 예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낙관적이었다. 어떠한 재보충도 실시하지 않고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던 것이었다. (중략) 예비부품의 보급은 부족했고 소모전 부품을 대체해서만 부대에 제공한다는 방침은 보급조직과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켰다. 정비부대 조직 또한 잘못되었다. 대부분의 정비부대는 독일 본국에 잔류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YTN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118회 119회, 독소전쟁의 승패를 가른 스탈린그라드 전투 1부, 2"

https://youtu.be/E8SH71j7fO8?si=lLOiUFesGFvlhsCJ

https://youtu.be/3JVuYATLqY4?si=TstS8LYQQ--8mBBV

*스탈린그라드(Сталингра́д, Stalingrad) : 현 러시아 볼고그라드(Волгогра́д, Volgograd), 러시아의 볼가강 서안에 있는 도시 

1925년 4월 10일 스탈린이 자신의 이름을 딴 스탈린그라드로 명명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기습 침공한다. 독일군은 9월에 모스크바 근방 30km까지 진격했으나, 소련군의 반격과 보급 문제과 날씨(라스푸티차로 전차 진격 어려움, 혹독한 추위)로 기세가 꺽인다. 

1942년 바로바로사 작전 실패 후, 독일은 유전지대이며 군수물자 통로인 캅카스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캅카스 점령 목적은 유전지대를 차지하는 것과 더불어 미국에서 소련으로의 보급로(페르시아선)를 차단할 수 있다.
스탈린그라드는 사실 독일군 공세 경로이 있지 않다. 캅카스로 진격하는 방향의 왼쪽에 위치해 있는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의 좌익을 보호하는 거점 확보 목적과 도시가 갖고 있는 정치적인 상징성에 때문에 공격하게 된다.
1942년 8월 23일 스탈린그라드 외곽에 도착한 독일군은 48시간 약 1천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공중 폭격을 했고, 1주일 만에 볼가강 제외한 모든 지역을 포위하였다.
폐허가 된 도시는 독일군의 전차 기동이 불가함에 따라 보병이 진입하여 건물에서 대규모 시가전을 벌였다.
볼가강이 주요 보급선으로 볼가강을 지키고자 했던 소련군의 의도였다.
독일군은 건물 곳곳을 모두 수색해야 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군의 총 공세와 스탈린그라드 대부분을 점령한 상황에서도 소련군은 끝까지 버티며 저항한다.
8월에 시작한 전투는 어느새 겨울이 되고, 혹독한 추위에 독일군은 지쳐간다.
소련군은 후방에서 증원하여, 1942년 겨울에 독일 동맹국을 공격한다. (천왕성 작전 : 1942년 11월 스탈린그라드 탈환을 위해 소련군이 펼친 포위 기동 작전, 상대적으로 약한 독일 동맹국 루마니아 먼저 격파하여 독일군을 포위 )
독일군은 시간전만 집중해 스탈린그라드에 병력을 너무 집중시켰고 동맹국의 상황을 돌보지 않아, 포위를 막지 못했다.
독일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공중 보급으로 독일군을 구할 수 있다고 히틀러에게 보고한다.
1942년 레닌그라드 주변 데미얀스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에 포위되었으나, 공중보급으로 탈출시킨 성공 사례가 있었다.
문제는 시가지의 독일군 26만명이 먹기 위해서는 매일 750톤이 필요하나, 실제로 일일 보급량은 평균 150톤 정도 밖에 안 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첫 공중 보급품은 탄약과 유류였다. (히틀러는 탄약과 연료 부족으로 고립되었다고 생각)
독일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겨울 폭풍 작전'을 수립하여, 스탈린그란드 인접까지 진격하나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 고수(히틀러 명령에 따라)한다. (당시 제6군의 극심한 보급부족 상황으로 돌파 작전이 불가능 하고, 독일군 전체에게 위기가 될거라 파울루스가 판단했을거라 추정)
1943년 1월 31일 파울루스는 소련군에 항복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소 전쟁의 향방을 가른 전투로, 동부전선 독일군에 큰 피해를 주며, 나치 독일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전사자 추정치
  - 추축군 80만영 (독일군 40만, 동맹국 루마니아군 15만, 이탈리아군 11만, 헝가리 14만명)
  - 소련군 112만명 (대부분 시가지 볼가강 주변)

 

*라스푸티차 (распу́тица,  rasputitsa) :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봄과 가을시기 토양이 진흙으로 바뀌는 현상

*캅카스 (Caucasus) :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산악지역이다. 러시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이 위치

*페르시아선 : 랜드리스(무기대여법, 1941년 미국이 연합국에 전쟁 물자를 제공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에 따른 소련 공급선 중 하나

   루트가 가장 길지만, 전체 물량의 27%가 공급됨

   북미 선적 - 아프리카 희망봉 통과 - 페르시아만 환적 - 스탈린그라드 도착

* 무기대여법 (Lend-Lease) :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소련, 중국 등 연합국에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제공할 수 있게 만든 법

* 겨울 폭풍 작전 : 1942년 12월 12일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당한 독일 제6군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
   스탈린그라드 보급선을 연결해 제6군의 전투력 회복한다는 작전(히틀러 보고용)이나, 실질적인 목표는 제6군 구출 작전

   1942년 12월 18일 제6군과 48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으나, 제6군의 탈출 포기로 '겨울 폭풍 작전'은 실패

제2차세계대전 바르바로사 작전 (출처 : YTN(
제2차세계대전 1942년 유럽 동부전선 (출처 : YTN)
제2차세계대전 랜드리스 공급선 경로 (출처 : YTN)
제2차세계대전 1942년 유럽 동부전선 (출처 : YTN)
제2차세계대전 1942년 유럽 동부전선 (출처 : YTN)
제2차세계대전 스탈린그라드 상황 (출처 : YTN)
제2차세계대전 겨울 폭풍 작전 지도 (출처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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