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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ou can't manage what you can't measure" Peter Drucker
물류

[물류 관련 책] 미친 SCM이 성공한다

by Vitaminymc 2024.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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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 SCM이 성공한다  ]

예측 불허의 시대, 글로벌 기업들의 생존 전략기!!
스탠퍼드 대학에서 생생하게 전하는 잘나가는 기업들의 공급전략!

미친 SCM이 성공한다.
저자 : 민정웅

인하대학교 아태물류학부/물류전문대학원 교수 (2005.9~)
발행처 : 영진닷컴, 2014년 7월 25일 (1판 1쇄 발행)

Source : 교보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54462

[ 책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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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 WHY - SCM에 대한 사소한 궁금증 : 왜 SCM은?
1. 왜 SCM은 지루하게 느껴질까?
2. 왜 SCM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울까?
3. 왜 우리는 SCM을 서로 다른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을까?

PART II. WHEN - SCM, 30년의 짧은 역사 그러나 기나 긴 여정들
1. “SCM”이란 말은 언제 처음 등장하게 되었을까?
2. SCM의 뿌리, Logistics와 관련한 몇 가지 시시콜콜한 상식
3. 전쟁 속의 물류 이야기
4. 오늘의 SCM을 있게 한 지난 60년의 순간들

PART III. WHAT - SCM을 새롭게 정의하다
1. SCM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
2. 미래의 글로벌화와 핵심가치
3. SCM을 새롭게 정의하다 - ”Look Entire Ecosystem“

PART IV. WHO - SCM을 새롭게 이해하는 기업들 : “모든 SCM은 다 옳다”
1. 타마고야(玉子屋)의 도시락 반란 : IT 없이 오배송률 0%에 도전한다
2. 패스트 패션 시장의 3인 3색 기업들: ZARA, H&M, 그리고 UNIQLO
3. 같은 꿈을 꾸지만 다른 길을 걷는다

PART V. WHO - SCM을 새롭게 이해하는 기업들 : “SCM이 산업과 비즈니스 모델을 정의한다”
1. 핵심가치체계로서의 SCM이 정의해주는 비즈니스 모델
2. 신발에는 관심 없는 신발유통회사 ZAPPOS
3. 가구가 아닌 박스(Box)에 미치다 : DIY 가구회사 IKEA
4. HW와 SW의 IT생태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 : SCM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애플의 디지털 공급사슬

PART VI. WHERE - SCM의 미래 : “모든 산업은 SCM으로 통한다”
1. 아마존, A부터 Z까지를 온라인으로 유통시키는 SCM 기업
2. 구글, 비트와 원자를 결합하는 SCM 기업

PART VII. HOW - SCM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1. 패러다임이 새롭게 만들어지기까지
2. 보는 능력의 중요성 - SCM을 새롭게 “바라보다”


[📘"미친 SCM이 성공한다" 주요 구절 ]

아래 내용은 책 내용을 그대로 또는 일부 수정 ( 문구 수정, 참고 이미지와 보충 설명 추가 등) 한 내용임

[ SCM의 뿌리, Logistics와 관련한 몇 가지 시시콜콜한 상식 ]

'Logistics'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병참(兵站), 즉 군수물류를 의미합니다. 그 어원에 대해 사전에서는 라틴어 'Logisticus'와 19세기 프랑스어인 'Logistique'에서 유래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Logisticus와 Logis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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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isticus는 계산(Computation)을 의미, Logistikos라는 고대 그리스 언어가 변화하여 생긴 말

Logistikos는 계산에 능통한 능력 혹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Logos) 판단력을 의미

 

 Logistique는 Loger(프랑스어)에서 기원

영어 Lodge가 의미하는 숙박(宿泊) 혹은 숙영(宿營)과 같은 뜻

1810년 스콧 매거진(SCOTS Magazine)에 독일 괴팅겐 대학의 윌리엄 뮐러(Williarm Muller)가 출판 예정인 "전쟁 기술의 요소(The Elements of the Art of War)"란 새로 발간될 책을 소개하면서, 이 책에서 다루어질 주요 내용 중의 하나로 'Logistics'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년 후 뮐러 박사는 "전쟁 과학의 요소(The Elements of the Science of War"로 책 제목을 바꾸어 출판합니다. 이 책에서 뮐러 박사가 전쟁 과학의 세부분야 중 하나로 'Logistics'를 언급하면서 이를 설명한 대목입니다.

전투대형, 훈련, 작전(manoeuvres) 등을 다루는 전술(tactics) 분야는, 시간과 공간을 고려하여 작전을 진행하기 위한 분석기법인 'Logistics'의 영역을 포함한다. 
→ 시간과 공간의 제약조건이 작용하는 모든 군 작전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준비하는 기법들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

 


[ 전쟁 속의 물류 이야기 ]

슬픈 현실이긴 하지만 물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이며, 물류는 반복되는 전쟁과 원정(遠征)의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 왔습니다. 물류는 전쟁의 승리를 위한 필수적인 역량으로 활용되어 왔고, 또한 그 전쟁으로 인해 다시 물류가 한걸음 더 진보할 수 있었습니다.
물류가 전쟁을 통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조직화된 군대를 이끌고 이웃 나라로 원정을 떠나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원정 기간 동안 수많은 병력을 먹이고, 그들이 사용할 무기와 장비를 옮기며, 함께 이동하는 말과 낙타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군인은 위(胃, 밥통 위)로 행군한다 (An army marches on its stomach)"라고 했던 나폴레옹의 말이 옥스퍼드 사전에 정의되어 있을 정도이니, 전투 그 자체로 인한 패배보다도 물류의 문제로 인하여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자멸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Source:: https://www.azquotes.com/quote/31328


[ 알렉산더 대왕 - 물류를 통해 18,000km의 원정을 가능케 하다 ]

인류역사상 가장 긴 원정갈에 올랐던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의 전광석과 같은 기동력의 비밀에는 물류의 힘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물류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것은, 그의 부왕인 필립포스 2세때부터였습니다. 그리스는 군대가 원정길에 오르게 되면 수많은 노예와 함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가득 실은 긴 수례 행렬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필리포스 2세는 군수품을 운반하는 대규모 수례 행렬이 군의 기동성을 저해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군수품의 공급을 스스로 해결 (자신의 장비와 보급품을 직접 운반)할 수 있는 자급자족형 군대로 훈련시켰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바다나 강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역으로의 원정의 문제점을 물류 관련 정보 (해당 지역의 기후와 지형, 상대 진영의 보유 식량, 이동 경로와 도로망 등)의 적극적인 수집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육상에서의 대량수송 방법 부재로 인해 해상운송에 사용되는 선박의 중요성을 깨닫고, 쿼드러렘이라는 선박을 이용하여 수많은 군인과 전쟁 물자를 신속히 운반하여, 인도 대륙에 걸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일반적인 선박 : 약 400톤/회 운반 육상 운반을 위한 말 : 100kg
 - 말들은 하루에 약 10kg 정도의 건초를 먹어야 함

 

Alexander the Great Empire (https://www.worldhistorymaps.info/wp-content/uploads/2021/03/alexander_323bc.jpg)


[ 삼국지 속의 물류 이야기 - 관도대전]

원소의 주력부대가 조조와의 전쟁을 위해 황하 (Yellow River) 북쪽으로 행군할 당사의 총 병력은 70만 명에 달했지만, 조조는 기껏해야 3~4만 명의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조조군은 관도 (Guandu)에 진을 치고 원소 진영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전황이 점차 지구전 양상을 띠기 시작하자 조조군 진영은 식량의 부족으로 고생하기 시작합니다.
원소 진영의 모사(謀士, 책사) 허유의 부정부패가 적발되어 그의 가족들이 체포되자, 원소를 배신하고 조조에게 투항하여, 순우경(淳于瓊)이 원소군의 군수품을 운송하는 것과 순우경이 오소(烏巣)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조조에게 알려주었고, 조조는 오소를 기습하여 순우경의 군은 전멸되었고 군량은 모두 불탔다. 

Source : https://ko.wikipedia.org/wiki/관도_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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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경군이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 진영은 책임 소재를 두고 내분이 벌어졌다. 이에 장합이 배신하여 원소를 공격했으며 진영을 불태우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합의 공격을 받은 원소는 단지 800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갑옷도 입지 못한 채로 급히 도망쳤는데, 예상치 못한 아군의 습격에 더해 총사령관의 행방과 생사마저 알 수 없었던 나머지 군사들은 대혼란에 빠져 사실상 완전히 무너졌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A%B4%80%EB%8F%84_%EB%8C%80%EC%A0%84)

원소는 군량을 승리의 가장 중요한 필수요건으로 판단하였기에 이를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순우경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순우경은 이제 늙고 쓰임이 없어져 군량이나 운반하는 허드렛일을 맡았다고 생각하여, 밤이면 밤마다 울적한 마음을 술로 달래고 있었습니다. 물류를 핵심 역량이 아닌, 단순한 후방 지원 업무쯤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어찌 되었던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의 기습공격을 받은 순우경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본 채 자멸하게 됩니다. 


[ 삼국지 속의 물류 이야기 - 읍참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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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참마속 [泣斬馬謖]
1. 원칙을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림

2. 중국 촉나라 제갈량이 사랑하는 부하 마속이 군령을 어기자, 군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울면서 그의 목을 베었다는 일에서 유래

 

(출처 : 읍참마속 – 다음 국어사전 (daum.net) )

유비가 죽은 이후 제갈량은 북벌을 위해 성도(成都)를 출발했습니다. 제갈량은 촉군의 군수물자 수급을 위해 가정(街亭)이라는 마을의 수비를 마속(馬謖)의 요청을 수락하며 맡기고, 마속에게 절대로 선제공격하지 말고 협곡의 입구를 굳게 지키기만 하라는 조건을 내세웁니다. 마속은 가정에 도착하여 큰 공을 세우려는 과욕으로, 적을 유인하여 공격할 계획으로 산 위에 진을 치고 말았습니다. 마속의 생각과는 달리,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았고, 점차 식수가 끊기게 되면서 마음이 다급한 마속은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하였으나,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속의 실패로 인한 물류의 문제로 결국 제갈량은 북벌 계획을 접어두고 후퇴합니다.
마속과 '가정을 빼앗길 경우 자신은 물론 모든 가족이 참형을 당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는 약속에 따라, 마속은 군령을 어긴 죄로 처형되고,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합니다. 


[ 로마의 도로망으로 연결된 권역별 물류센터 : 물류거점도시 Burg]

로마군은 제국의 전쟁에 필요한 수많은 기지를 곳곳에 건설하였습니다. 이러한 군사 거점들은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병참을 위해 로마로부터의 원할한 물자 공급을 필요로 하였고, 이러한 목적하에 기원전 4세기부터 '아비안 가도 (Appian Way)'라 불리는 군수 전용도로가 건설되었던 것입니다.
중세 봉건주의의 기초를 닦았던 서로마제국 (책에는 동로마제국으로 명기되어있으나 오기로 판단됨)의 샤를 마뉴 (샤를 대제, 740년~814년)는 물류를 새롭게 주목하며 과거와는 다른 2가지의 새로운 병참 전략을 도입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장비를 전담 수송하는 별도의 병참 조직을 만든 것입니다. 그는 이 수송 전담조직을 활용하여 전쟁 보급품을 공급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중심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의 원정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병참 전략은 봉건 영주들의 영토였던 'Burg (부르크, 성시, 城이 있는 도시)'를 분산형 물류 네트워크의 배송기지로 활용한 것입니다. 샤를마뉴 대제의 핵심 전략인 Burg는 전방의 요새화된 군 주둔지로, 군 작전을 위한 기지인 동시에, 전후 정복 지역의 질서유지나 새로운 전쟁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Burg를 연결하는 물류 및 통신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어느 한 지역에 대한 외부 공격이 있을 때 이를 가장 인접한 성시를 통해 즉각적으로 대응을 하는 단순하지만 효율적인 물류전략을 취하였습니다.

 

샤를 대제 (샤를 마뉴, 카를 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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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기원 학설 

신성로마제국, Holy Roman Empire의 제국의 범위는 지금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서부

 

첫 번째, 서기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왕국의 카롤(샤를마뉴)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서로마 제위의 부활을 선언한 시점을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다.

 

두 번째, 962년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Otto I)세가 황제에 올라 제위를 부활하면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후자를 지지한다.

첫 번째 견해를 따르면 신성로마제국은 800~1806년 사이 1천년, 두 번째 견해를 따르면 962년부터 1806년까지 844년간 지속되었던 제국이다.

 

카를 대제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Leo III)로부터 로마황제 황제관을 머리에 얹는다. 그는 300여년 전에 멸망한 서로마제국을 부활시켜 황제에 오른다.

카를 대제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 프랑크 왕으로 수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 왕국의 영토를 두배로 늘렸다. 서유럽에서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전부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게르만족 지역을 대부분 장악했고, 아시아계 유목민족과의 전쟁에서 헝가리 지역까지 정복했다.
카를 대제가 로마 황제가 된 것은 속세의 군주와 교황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카를은 사방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교회의 권위와 옛 로마제국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 했다.
이에 비해 로마 교회는 동쪽의 그리스 정교와 주도권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강력한 세속 권력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탈리아 내의 안정을 원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황제는 로마에 인접한 롬바르드 왕국을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게 했고, 로마교회 내 성직자들과 접촉해 교황에 도전했다. 교황은 생존을 위해서도 서유럽에서 가장 힘이 센 카를 왕의 지원이 절실했던 것이다.

 

오토 1세는 936년 8월 7일 24살인 그는 카를 대제가 프랑크왕국 수도로 삼았던 아헨(Aachen)에서 대관식을 열었다.  오토 1세는 오토 대제라고 불린다. 그는 독일 역사에서 첫 황제로 꼽힌다. 그는 독일왕이자 이탈리아왕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였다. 아울러 자신에게 대드는 교황을 폐위시키고 자기 편의 사람을 옹립하는 그야말로 황제였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3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8

 

샤를 대제 (샤를 마뉴, 카를 대제) 

카롤루스 왕조 제2대 프랑크 국왕이자 대한민국에서는 라틴어 발음을 따른 카롤루스 마그누스, 프랑스어 발음을 따른 샤를마뉴, 독일어 발음을 따른 카를 대제로도 알려져 있다.

- 프랑스어 Charlemagne 샤를 대제 (magne),

- 독일어 Karl der Große 카를 대제 (der Große)

- 라틴어  Karolus Magnus 카롤루스 대제 (Magnus)

- 이탈리어 Carlo Magno 카롤로 대제 (Magno)

- 영어 Charles the Great 찰스 대제

카롤루스는 서부, 중부유럽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크게 확장했다. 재임하는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800년 12월 교황 레오 3세에게 동로마 황제와 대비되는 서로마 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A1%A4%EB%A3%A8%EC%8A%A4_%EB%8C%80%EC%A0%9C


[ 간편진열포장의 원조, 징기즈칸]

몽고군은 장거리 원정 시 1인당 보통 5마리 정도의 말을 받았는데, 기병 한 사람이 5마리를 번갈아 타며 시속 10km의 속도로 하루 200km를 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들은 별도의 건초나 사료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생존력이 강하고 체력과 지구력이 뛰어난 몽고 말은 겨울에도 눈을 파서 풀을 뜯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야생의 생활에 익술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 기병별로 지급돈 5마리의 말에 다량의 화살과 식량, 식수 등의 필요한 물품을 모두 싣고 이동하였기 때문에, 별도의 병참부대 없이도 전쟁의 수행이 가능했습니다. 물론 유사시에는, 그들이 평상시에도 즐겨 먹은 것처럼, 지급받은 말을 식량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몽고군의 경량화된 군장과 몽고의 전통 음식인 보르츠 (Borts)도 복잡한 식량 수급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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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츠(몽골어: борц)는 그늘에 매달린 긴 조각으로 자른 공기 건조 고기이다. 몽골 유목민의 생활 방식과 지역 기후 조건은 고기를 보존하는 특별한 방법을 만들어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A5%B4%EC%B8%A0 )


보르츠는 과거 몽골 제국이 전쟁 때 전사들의 식량으로 한 몫 했다고 한다. 가볍고 부피가 작아 휴대하기가 편해 전투식량으로 제격이었었다고 다큐에 자주 등장한다.

(출처 :뉴스웨이브  https://www.newswave.kr/news/articleView.html?idxno=407908 )


[ 물류의 실패가 낳은 백의천사 나이팅게일]

크림 전쟁은 1853년 10월부터 1856년 2월까지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왕국, 오스만제국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러시아제국이 벌인 전쟁입니다. 
 
크림전쟁 당시 영국군은 물량으로만 따져보았을 때, 군수물자 자체가 부족하지는 않았습니다. 1814년에 끝난 나폴레옹과의 반도전쟁으로 인해 비축해 놓았던 총기와 장비가 충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군수물자들은 크림 반도 남단 발라크라바에 위치한 군수물자 저장시설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양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발라크라바에 있는 군수물자를 일선 전투 현장으로 운송해 줄 수 있는 중앙 관리조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당시 7개의 군 관련 조직을 통해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개별적인 담당 업무가 독립적으로 분장되어 있어, 병참 관련 업무를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이 결여되고 실제 전장에서 필요한 보급품의 물류 지원이 원할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 Commander in Chief : 전반적인 군 작전 총괄
  • Master General of the Ordnance : 병기 담당
  • Board of General Officers : 군복 담당
  • The Commissariat : 수송 담당
  • The Medical Department : 부상자 치료 등 의료관련 지원 담당
  • Secretary at War : 민간업체를 통한 물자보급을 위해 군수품 구매 계약 담당 조직
  • Secretary of State for the Colonics : 식민지 통치 총괄

치열한 전쟁 도중 의약품 물자 수송에 문제가 생기자 전쟁터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당시 영국군의 야전 병동에서 의약품 부족으로 인한 부상병의 사망률은 42%에 달할 정도였습니다.나이팅게일은 급기야 자신이 직접 훈련시킨 38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전쟁터로 출발하게 됩니다. 나이팅게일은 사재를 털어 부상병들의 소독과 위생관리, 식사 등을 직접 관리하였는데, 42%였던 부상병들의 사망률이 6개월 만에 2.2% 수준으로 떨어지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영국 정보의 무능함에 대한 비판 여론으로 영국 정부의 내각 수반이 파멀스톤(Lord Palmerston) 정권으로 바뀌고, 발라크라바에 있는 군수품 관리를 중앙집중형 체제로 전환시키면서 전장에서 물류 상황이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최대 격적지엿던 세바스토풀과 발라크라바를 잇는 약 11km 구간의 철도가 7주만에 완공되면서, 의약품을 비롯한 군수품의 보급과 부상병의 수송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크림전쟁에 참여한 연합군 국가 중 군수 물류 지원이 가장 잘 이루어진 나라는 단연 프랑스였습니다. 나폴레옹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그들만의 물류 노하우는 크림전쟁에서도 빛을 발하였는데, 영국의 무질서한 군수 관리와는 달리,  ‘트레 드 에퀴파쥐(Train des Equipages)’라는 물류 전담 조직이 있었습니다. 병참을 전담하는 이 독립 조직은 1807년 3월 나폴레옹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이 부대가 창설되기 이전 프랑스군의 병참 업누는 대부분 민간에게 아웃소싱되었는데, 군수물자의 구매는 물론, 보급품의 운송에도 민간이 보유하고 있는 수송 수단(주로 마차)을 임차하여 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상시 민간에 의한 군수 처리는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전시에는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담보로 포탄과 총알을 뚫고 신속히 군수품을 수송해야 할 어떠한 인센티브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나폴레옹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최소한의 무장으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최전선에 물자를 보급할 수 있는 '트레 드 에퀴파쥐'부대의 창설을 통해 병참의 신속성을 향상시켰습니다. 이러한 프랑스의 노하우는 크림전쟁의 의약품 수배송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영국의 경우와 같이 의약품 부족과 부상자에 대한 처리지연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https://de.wikipedia.org/wiki/Logistik
https://traindesequipages.blogspot.com/2009/01/historique-de-larme-du-train.html
https://m.blog.naver.com/klip2013/221313164210


[ 세계대전으로 인한 패러다임의 변화 - "이젠 움직일수록 물류는 더욱 어려워진다"]

총과 대포에 의존하는 전쟁의 양상을 띠게 돼면서 군대가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탄약의 지속적인 공급이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1914년~1918년)부터는 군 작전에 따른 이동 경로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탄약 등의 군수물자를 보급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곧이어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1939년~1945년)에서도 역시 심각한 상황을 야기하였는데, 특히 전장의 범위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글로벌하게 확산되면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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